예측 불허의 구름 vol.2

번역 2012. 3. 28. 14:08 |

 

 

예측 불허의 구름(斜め上の雲) 제 2 편 ㅋ 중간 건너뛰고 대충 번역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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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군은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한국의 수도 서울은 불과 4일 만에 함락되었다.
 
전편에 언급한 것처럼, 석원의 고향 파주는 서울의 북방에 있다. 북한군 주력병단이 통과한 뒤에야 사람들은 간신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작 사흘만에 나라의 수도가 함락되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다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석원은 재차 이승만 정부의 취약성에 대해 놀랐다.

 
7월이 되자 전쟁은 더더욱 북한군의 우세로 진행되어 조선은 금방이라도 인민공화국이 될 것만 같다고 석원은 생각했다. 허나, 아버지 김신오는 무엇인가를 느꼈던지 갑자기 가재를 정리해 야음을 틈타 부산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아무리 호적계의 말단 관리지만, 서투르게 남아 있어서는 북한군의 물자 징발은 커녕, 연행되어 죽거나 전선의 총알받이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석원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보다는 싸우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 석원의 머리에는 열살때 경험한 일본 패전 후의 참상과 독립군이라 칭하던 건국준비위원회 무리들이 들어와 설치던 그 모습이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전 대전에서 남을겁니다.」
 





대전에서는 아직 한국 육군의 정규군과 의용군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미군도 있다고 한다. 석원은 무작정 거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석원이 정식으로 한국군에 입대한 것은 그 다음해 여름이지만, 대전에서 가족과 헤어질 때 아버지 김신오는 이렇게 말했다.







「기왕 한다면 확실히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해라.」
 






라며 아들을 격려했다. 주위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끄덕인 것을 보면 이제 살아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가족들과 헤어진 석원은 의용병 모병지로 갔지만 운좋게 사단 사령부에 보내지는 무리들에 선발되었다. 석원이 도착한 사령부 텐트의 안쪽에는 각하라 불리우는 사단장이 있었다. 키는 약간 작지만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남자로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옆에 차고 있었다. 지나가던 그 사단장이 갑자기 석원을 보고 물었다,






「너는 몇 살인가?」
 






나이를 솔찍히 대답하면 되돌려보낼 것이다. 하지만 전시중이기에 본인이 말한 나이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석원은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19세입니다」
 





- 라고 대답했다.







「그래? 좀 어려 보이는데 넌 무슨 띠인가?」








「.......돼지띠입니다」




 

- 석원이 당황해 사실대로 대답하자 사단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19세라면 양띠여야 했다. 사단장은 이 소년이 나이를 속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 같지만, 묵인하는 것 같았다.







「이름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그 사단장이 이름을 물어본 것이 이후 석원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 김석원이라고 합니다」








「.....호.....나와 동성/동명은 예전 일본군 소년병도 있었건만 너는 좀 어리구나.」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그렇게 말하곤 석원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 내 옆에서 당번병 겸 연락병으로 근무해라 」







- 라고 말했다.



이름이 같았기 때문일까. 김석원 장군은 석원을 자식처럼 귀여워했다.








「 아직 어린 너를 전선에 내보낼 수는 없다. 나와 있을 때는 당번병을 하고, 내 부관 밑에서 연락병을 하면서 공부해라. 군인이 되고 싶다면 공부해야 한다. 」
 






그렇게 말하곤 틈날 때마다 작전요무령과 같은 군사학과 일본어에 대해 강의를 했다.







「기초는 가르쳐 준다.」
 






그리고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 라고 했다.
 
이 김석원 장군은 일제시대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한 뒤 북지전선에서 맹활약, 산서에서는 일본군 1개 대대를 지휘해 국부군 1개 사단을 격파해 금치훈장 공 3급을 받았다. 소좌의 몸으로, 게다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 훈장이 수여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창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군에 있어서는 제일의 용장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은...






「 굉장한 행운이다」






- 라고 참모장 최경록 대령이 말했다.


김석원은 광복 후 한국 육군 대령으로 한국군 제 1 사단장에 임명되어 한국 육군의 건설에 노력하고 있었다. 일본의 옛 무사같은 강직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북교역에 관한 직언을 행했기 때문에 해임되어 예비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온한 정세를 헤아려 대전에서 의용군을 조직 훈련해 개전시에는 군부의 요청으로 현역으로 복귀해 수도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가 같은 이름이라는 흔치 않은 인연 외에도 석원을 거둬들인 것은 태평양 전쟁 말기 수많은 일본군 소년병들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기에 더이상은 젊은이를 사지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작용했을 것이리라.

 
허나, 석원의 이런 행운과는 별개로 한국군은 여전히 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장병의 대부분이 외출, 외박에 나가 당직 밖에 남지 않았던 일요일 새벽녘의 기습을 받은 뒤 전열을 추스리지 못했고 장비도 월등히 뒤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개전시 남북의 군사력은 현격한 갭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자면 당시 한국군에게는 비축탄이 단 몇 일 분도 없었던 상태였고, 1월에 한미 상호방위 협정이 조인되었지만 그에 따른 군수 물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통일을 외치고는 있었지만 실제론 도저히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미 군사고문단이 그것을 허용할 리도 없었다. 또한 비록 그 상태로 북침했다고 해도, 북한군은 충분히 반격이 가능했고 오히려 역침공을 허락해 똑같이 반도 남단의 부산까지 몰릴 가능성이 더 컸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전면에 앞세워 진격해 왔지만 한국군에게 전차는 없었고 대전차 병기도 부족했다. 유효한 대전차 병기라고는 미군이 가지고 온 3.5 인치 바주카만이 간신히 소련제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지만 그 수는 적어 미군조차 고전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석원은 이렇게 많은 전차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에게 놀러갔을 때 남방으로 반출되던 일본군의 전차를 몇 대 본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 전차 집단은, 포탑이 민가의 처마 끝을 칠 정도로 좁은 골목을 가고 있었는데 어린 석원이 봐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석원과 아버지 앞에서 전차대의 대열이 멈추고, 선두 차량의 해치가 열리고 일본군 장교가 내려왔다.





「서면은 어딘가?」
 




안경을 쓴 그 일본군 장교는 풀죽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버지가 이리저리 장소를 설명해 주자 다시 탑승해 출발했다.






「.........저게 정강백만 관동군인가. 고작 저런 장교로 괜찮을까.」
 





아버지의 혼잣말을 들으며 보았던 그 장교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였던 것 같다. 석원은 그 광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 때 본 일본군 전차는 아담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었지만 포신이 가늘고 짧아 약해 보였다. 그에 비교해 북한의 T-34는 거친 외관이지만, 소년에 눈에도 그만큼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사단장 김석원 준장에게 그런 감상을 말하자.







「 T-34는 훌륭한 전차다. 독일조차 저녀석에 호되게 당했다고 한다. 네가 부산에서 보았다는 것은 아마 관동군의 치하 전차일 것이다. 그것은 대전차 전투는 할 수 없는 물건으로 무엇보다..............」
 






........애초 설계가 보병 전투의 보조가 목적이므로 방법이 없는 것이었지만.........이라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왜 적의 전차를 칭찬하십니까?」
 







석원은 그게 의문이었다.







「 적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무슨 상관인가? 성능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석원 너는 우리나라를 좋아하는가?」







「네.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큰 나라라고 생각하나?」
 








잠시 생각하고 석원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석원 준장이 답했다.








「그것과 같은 것이다. 감정적으로 좋고 싫음의 문제와는 다르다 병기의 좋고 나쁜가의 문제다」







그러면서 김석원 준장은 군인에 있어 가장 피해야할 자세는 눈앞의 실물에 제멋대로인 규정을 적용시켜 납득한다는 경직성이다라고 말했다. 김석원 준장은 이어 말했다.






「나는 일찌기 일본군을 이끌고 미군이 지원하는 국부군과 싸웠고, 지금은 미국과 함께 소련이 지원하는 북괴군과 싸운다는 이상한 길을 가고 있다 」
 


 


그러면서, 그러한 경험에서 각국 군대의 장단점에 대해 느끼는 것이 많다고 했다.









「 뭐, 앞으로는 미국식 전략 전술이 주류가 되겠지만 그래도 옛 일본군의 전략/전술에도 배울 만한 점은 많다. 특히나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의 군대에서는 말이지.」
 








특히, 하사관이 병과 밀착된 점은 강점이라고 했다.









「 내 부대에는 옛 일본군 출신이 많다. 너는 앞으로 미국을 배워야 하지만 그들에게도 배우는 것이다. 알겠나? 」
 








김석원이 준장으로 현역 복귀해 의용군을 조직하자 한국 내에서 갈 곳을 잃고 있던 구 일본군 출신들은 그의 지휘 아래 집결했다. 이후 김석원이 수도 사단장으로 임명되자 김석원은 그들을 휘하로 두고 재편한 한국군 수도 사단을 인솔해 고분 분투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당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도 일본군색이 진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김석원의 사단은 특히 그것이 농후했다. 이와 같이, 열세에서도 끈기있게 싸우는 한국군에 유독 일본군 출신자가 많은 것에 미군은 주목했다. 미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서도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장교는 일본군 출신은 한국군 장교단 중에서도 꽤나 특수한 부류라고 생각했는지......
 





「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들 한국군 내 일본군 출신자 혹은 그 일파(만주군 출신)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용맹하다. 허나 생명에 대한 관념이 부족해 전황에 따라서는 매우 쉽게 사지에 몸을 던져서라도 싸운다. 」
 







- 라고 쓰고 있다.
 



장군은 소년에게 이어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병력과 무기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 힘이 없는 자는 지혜와 근성으로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최후는 육탄으로 몸을 던져 싸우는 것이다.」










......과연.....하지만 납득한 소년 석원의 얼굴에는 이내 불안한 표정이 력력했다.










「 걱정은 필요 없어. 조금만 더 버티면 미군이 온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좋다라고 김석원 준장은 말했다.
 






7월7일, 유엔 안보리에서 국제 연합군의 파견이 결정되어 미군이 주체가 된 연합군은 일본으로부터 출발해 부산에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일미군은 평화로운 점령지 주둔군으로 벌써 5년이나 보내 평시 편제인 채로 훈련받아 장비도 부족한 상황이었었다. 이래서는 미 육군이라도 북한군에 쉽게 반격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규모 지원군의 도착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7월 하순, 결국 한미 연합군은 대전으로부터 철퇴해 경상북도까지 철퇴했다.  그 몇 일 후,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명령으로  더더욱 남동쪽으로 철퇴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 적군의 진격을 지체시켜 연합군의 증원을 기다린다는 전략이 결정되었다.
 

당시 김석원은 수도 사단을 인솔해 안동을 지키고 있었지만, 최경록 참모장이 가져온 육본의 후퇴 명령서를 보곤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격앙했다. 앞으로 1시간 이내에 철퇴하라는 명령서였다...한국군 수도사단은 낙동강을 뒤로 하고, 문자 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철퇴하기 위해서는 낙동강에 야전부교를 가설해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피난민도 있다. 군민의 이동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며 특히나 지금같이 전군이 오직 밀리고만 있을 때는 전군 궤멸의 우려마저 있다. 실제로도 서울 철퇴시 한강교 폭파를 실행했을 때는 피난민까지 말려든 대참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육본은 그것을 단 1시간만에 하라고 말한다. 게다가 명령 접수 시각은 새벽 2시.......왜 이런 명령을 굳이 제공권이 확보되어 있는 주간에 하달치 않는지...어린 석원도 그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허나, 용장 김석원에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보다 지금은 불퇴전의 결의만이 아군을 떨쳐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했다. 밀리고만 있다고 도망만 가서는 안된다...적/아군에게 철저 항전의 결의를 보이도록 친 배수의 진을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나 원통했던 것이다.
 

결국 김석원 사단장은 군단 사령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에게

 

「귀관은 퇴각을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퇴각만 해서 이길 수 있는 건가? 」

 

 


............라고 야유하고 말았다;; 전황이 계속 밀리고만 있기 때문에 김백일 준장도 기분이 나쁘다..허나 만주군 출신인 김백일 준장은 군 경력에서 까마득한 후배였기 때문에.......

 

 

「....명령입니다. 후퇴는 명령입니다!!」
 

 

 

이에 수화기를 마루에 내던진 김석원 사단장은;;

 

 

「적을 눈앞에 두고, 어찌 살아서 퇴각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외치며 허리의 권총을 뽑아 자신의 관자놀이에 꽉 눌렀다. 어린 석원이 순간 팔에 매달렸지만 김석원 장군의 각오는 상당한 듯 놀라 뛰어온 최 참모장이 눈물을 흘리며 설득한 후에야 사단장은 간신히 철퇴를 승낙했다. 이후 한국군 수도사단은 동해안에 인접한 영덕까지 나아가 동부 전선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일견 개전으로부터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해 온 북한군이지만 그 속사정은 매우 힘들었다.
 

미국의 괴뢰 이승만과 그 잔당들을 반도에서 모조리 쫓아버리고, 5주년 광복절을 서울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것이 인민공화국 김일성 수상의 지상 명령이었다. 그 명령 때문에 북한군은 손해를 뒤돌아보지 않고 여기까지 진격해왔던 것이었다. 그 결과 전력 보충은 절망적이었고 병력 또한 각 사단에서 상한 80퍼센트 정도의 충족율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개전 초기 한국군을 압도했던 T-34전차 보충은 없었다(...)
 

보급도 잘 되지 않았다. 서전에는 계획적으로 비축된 탄약과 식량이 있었지만, 서울을 함락 이후 본격적인 남방 진공작전이 시작된 이후로는 보급로가 미 공군에 의해서 폭격당해 병참선은 토막토막 끊기게 되었던 것이었다. 탄약은 둘째치고, 식량조차 지역 주민으로부터 징발할 상황이 되었다. 전황이 좋을 때조차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는 군대를 좋아할 민중은 없다, 당연히 민심은 급격히 인민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금년 8월 15일은 서울에서 통일 국회를 개최한다」
 

 

.........그렇게 호언 장담하던 김일성도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전선이 교착되는 것 만으로도 사단장이나 참모들을 경질했다. 때문에 이 시기 인민군 상층부에는 일종의 기묘한 권태감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일선 병사들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 전의는 왕성했고, 미군도 방어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그리고..........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영덕의 구원은 어렵다고 판단해 진로를 바꾸어 포항에 들어가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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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裵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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