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허의 구름 vol.1

번역 2012. 3. 27. 11:24 |

 

 

일본 근대사를 다룬 시바 료타로 선생의 세미 논픽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 坂の上の雲) 패러디(...)로 무대와 주인공은 한국으로(...) 옮긴 예측 불허의 구름(斜め上の雲) 입니다;;

아주 예전에 술먹구(;;) 집에 들어와 인터넷 하다 우연히 발견한 건데, 그땐 꽐라모드라(;;) 斜를 針으로 읽어 바늘 위의 구름으로 번역했는데 명백한 제 오역입니다(;;) 아..술먹고 깼을땐 얼마나 쪽팔리던지(;;)

하지만 모처의 모님이(...) 지적한답시고 기울기 위의 구름으로(...) 번역한거 보곤 더 뿜었습니다; 이건 마치 국민학교 시절에 본 드래곤 퀘스트 III 만화책에서 보스인 마왕 바라모스를 '장미 모스' (....) 로 번역한 것 이후 최고의 번역이었달까요(;;)

 

여튼 글 나갑니다 ㅎ   

 

 

 

 

정말로 작은 나라가, 개화기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그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이 경기도이며, 경기도는 수도인 서울을 포괄하고 있는 이 나라의 중앙이다. 당시 경기도에 위치한 파주의 큰 읍은 금촌으로, 금촌 시가에는 이미 철도 역사가 건설되어 있었고 이 철도는 서울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만철(만주철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금촌은 서울 북방의 요충으로 여겨졌지만 근처의 풍경이 한가로웠기 때문에 그처럼 대단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니 이 시대 작은 한국의 상징이 될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우리는 한 인물의 뒤를 쫓지 않으면 안 된다.
 


「어이~ 원~~」




어린 시절 원이라고 불리우던 이 이야기의 주인공 김석원(金錫元)은 일제시대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김신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 총독부의 공무원은 일본인이 대다수였지만 독점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김씨 가문은 조선시대 몰락한 하급 양반 가문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김신오는 어떻게든 말단 공무원은 될 수 있었다. 김석원은 쇼와 10년도에(1935년) 7개월 만에 태어난 약한 아이였지만 이후 장성해서는 건장한 남자가 된 것을 보면, 반드시 조산아라고 해도 그 후의 성장에는 지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석원이 10살이 되던 해의 여름, 천지가 개벽할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대일본제국의 패전과 그에 따른 조선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석원이 살던 금촌읍의 분위기는 사뭇 기묘했다.




「비적들이 마을에 온다」
 



..........이런 분위기로, 일본 관헌의 철수 후의 무정부 상태는 남아있던 조선인 공무원들도, 마을 사람들도 어찌할 줄 몰랐다. 게다가 특히나 이 마을에서는 소위 친일적이랄까, 자제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있던 집안이 많기도 하여 당시의 조선에서도 일본에 대해선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지원해 지나와 남방전선에 아들들을 보낸 집도 많다. 요컨데 해방 정국에서는 바야흐로 친일 모리배, 민족 반역자들이 많았던 마을이었다.
 
때문에 같은 조선인이라도 진정으로 조선 독립을 위해 지나나 만주에서 피흘리며 싸웠다는 광복군과는 달리, 일제시대에는 단지 불령 선인이었을 구 공산당계 반일 집단과 조선 내 민족주의 계열은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단지 비적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재빨리 전승자, 해방자라 자칭했다. 이들 소위 건국준비위원회 독립군은 파주를 접수하고 남하했지만 그 인원수는 불과 서른 명 안팎이었다.




「 악독한 일제에 가담한 죄로 15만엔의 배상금을 인민공화국에 헌납하라.」
 



- 라고(...)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독립군의 젊은 대장이 권총을 들이대며 읍사무소에 명해 때문에 마을은 공포에 휩싸여 결국은 그에 굽히게 되었다. 이들 소위 독립군은 이미 조선 천지는 우리 것이라는 교만함을 얼굴에 띄운 채 활보, 그들에게 돈을 바치지 않는 집과 가계는 닥치는 대로 불지르고 다녔다. 또한 읍내의 구 관공서 등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접수」
 




라는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석원은 10살 어린 시절에 본 이 광경을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어」
 




...라고 그는 후년 고향으로 보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다.

 
쇼와 20년, 아니 해방되었으니 서기로 말하면 1945년의 여름... 정체성 불분명한 건준과 사이비 독립군의 짧은 시절이 지나간 후에는 미소가 각각 남북 조선에 진주해 치안이 유지되는듯 했으나 곧이어 한반도의 유엔 신탁 통치안에 대한 찬부나 정치 사상에 대해 각 세력의 항쟁이 격화되어 결국 1948년에는 남북 조선이 분열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남조선에 성립된 대한민국은 여전히 농가가 곤궁했다. 석원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석원도 불과 13살의 나이부터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의 농사일 뿐만 아니라 남의 집 농사일과 온갖 허드랫일도, 심지어는 산에 들어가서 사슴이나 토끼까지 잡아다 마을 장에서 팔았다.
 
 
이런 석원의 아버지 김신오만큼 고향에서 일화가 많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저렇게 착실한 사람도 없다」
 




...........라는 이야기로,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다. 그는 몰락 양반가의 5남이었지만 일찍부터 독학으로 공부를 해 총독부의 하급 관헌수험에 합격해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던 중 광복이 왔다. 하지만 광복이 되자마자 빨리 세관 공무원에서 퇴직해..






「 해방 정국에서 내가 뭘 한다고.」
 




...라고 말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급한 나머지 건국준비위원회나 이승만 정권으로 허겁지겁 갈아타려고 한 구 일제시대 조선인 하급 공무원들은 대부분 정쟁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는 사람마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김신오는 이런 와중에도 일제 시대부터의 성실한 모습이 높이 평가되어 고향 금촌읍 호적계의 말단 관리로 다시 채용된 것이다. 다만 이 자리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박봉으로, 집안을 그 급료 만으로 부양하기는 힘들었다.






「 밥만은 먹여주마. 하지만 나머지는 자기 힘으로 해결해라.」
 




김신오는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석원이 남의 집 농사일을 대신 해주거나, 산에서 사슴이나 토끼를 잡아 돈을 번 것도 말하자면 아버지 김신오의 교육 방침이었다. 석원은 이 벌이로 간신히 돈을 모아 책들을 샀지만, 그러나 이 정도의 돈벌이로도 학교에는 갈 수 없었다.





「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
 



라고 석원이 조른 적이 있다. 하지만 김신오는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 내게 돈이 있어야지.」





이렇게만 말하고 마는 것은 미안했던지, 이 아버지는 이후 약간의 명언을 토해냈다. 나폴레옹이나 타이코 히데요시 등 동서고금의 영웅 호걸은 모두 빈궁 속으로부터 태어났는데 내게 능력이 없는 것도 말하자면 너희들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식에게 줄 학자금도 없으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석원아, 가난이 싫거들랑 공부를 해라」
 




이것이 이 시대의 유행이기도 했다. 정권은 미국과 대륙에서 귀국한 소위 독립투사들에게 넘어갔지만, 그 정부에는 실무가가 없었기 때문에 학문이 있어 실무를 할 수 있다면 일본 통치하에서 영달하고 있던 사람들이어도 국가는 고용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통치자는 바뀌었지만 일제 시대와 같이 취직의 길은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먹기 위한 길이었고, 특히나 광복으로 일자리를 잃은 소위 친일파의 자식들에게 있어 그것 말고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구출해 낼 방도는 없었다.





「나도 공부하고 싶다」





김석원은 늘 생각하곤 했다. 그러기에 남의 집 전답에서 밭을 갈고, 야산을 돌아다니며 사슴이나 토끼를 잡으면서도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공짜 학교는 없을까...」 




그렇게 있을 턱도 없는 꿈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 한국정부는 국내 통치에 부심하고 있었다. 그 상징이 바로 남조선 노동당이 주도한 대규모 반정부 봉기의 빈발이었을 것이다. 남조선 노동당은 1946년 11월에 남부 조선의 좌익 각 계파가 합동해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특히나 창군된지 얼마 안된 국방경비대(훗날 국군으로 승격) 내부에 조직자 공작을 행해 많은 동조자를 양산하고 있었다. 1948년 4월에는 제주도에서 이 남로당이 조직한 대규모 봉기가 벌어졌고, 10월에는 여수/순천에서도 군내 적색분자의 선동에 의해서 대규모 군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토벌전 끝에 지리산에 들어간 후 태백/소백산맥을 넘나들며 끝까지 항전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 패잔병과 합류해 최종적으로 진압된 것은 1956년이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철저한 숙청을 벌여 많은 군 간부가 남로당 관계자로 적발되어 처분되었다. 당시 소령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의 박정희도 불명예 제대 처분이 되었다.
 
허나 그 군이라고 해봤자 정부의 재정난에 의해 급여 수준은 낮았고 군복 이외의 일용품 조달과 모병을 각 연대에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병기에 대해서도 1948년의 여름 경부터 미군의 제식 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차는 없었고 야포도 105밀리 유탄포가 최대, 공군은 연습기와 연락기 밖에 없었기에 근대적인 전력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49년 6월, 미군은 한국으로부터 철수했고 다음 해 1월에는 대만과 한국을 미국의 서태평양 방위라인으로부터 제외한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 국민들은 불안하게 생각했다. 허나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도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1948년부로 소련군도 북한으로부터 철수했기에 가까운 시일 내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진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후 미국은 애치슨 성명으로부터 2주일 후 한국과 한미 상호방위 협정을 조인해 최소한의 연결고리는 마련한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이 내보내 온 항일구국의 영웅이자 조선민족의 지도자(...) 김일성 아래에서 기업의 국유화나 농지개혁이라는 일련의 정책이 취해져 경제는 빠른 시일내에 회복하고 있었다. 이것에는 공산주의 특유의 중앙 통제에 의한 경제정책이 제 기능을 발휘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북조선은 일제시대 댐이나 화력발전소 등 중공업 인프라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어 납쪽보다 상대적으로 공업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 그러한 시설이나 기업을 접수, 국유화한 것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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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裵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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