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허의 구름 vol.3

번역 2012. 3. 29. 11:23 |

 

김석원 준장이 지휘하던 한국군 수도 사단이, 안동에 전개하고 있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군사령부의 막료 회의 참석 때문에 김석원 사단장은 막료들과 석원을 데리고 제 1 군단 사령부에 갔던 적이 있었다. 후퇴 중 사령부에 들른 신성모 국방장관은, 그 자리에서 재일 한국인 사이에서 의용병으로 지원하는 인원이 많아 머지않아 부대도 편성되어 도착할 것이라고 김석원 사단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노성을 질렀다. 제 1 군단장  김홍일 소장이었다.

 

 

 


「 36년이나 걸)려 일본놈들을 이 땅에서 내쫓았는데, 또 놈들이 온다니 기쁜가?」

 

 

 

이말에 경멸의 표정을 드러낸 김석원 준장도 반박했다.

 

 

 

「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압니다만 그들은 동포입니다 동포! 」
 

 

 

 

소년 석원은 이후로도 이만큼 분노했던 김석원 장군을 보았던 적이 없다. 전장에서의 맹렬한 질타와도 또 다른 이질의 분노였던 것이다.

국민당군 출신의 김홍일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출신과 그 관계자들은 꺼려 싫어하고 있었다. 또한 정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대륙전선에서 국민당군을 오합지졸이라 부르며 격파해 왔던 김석원 준장 쪽에서도 아무리 광복군이라도 국부군 출신은 부담스럽다. 이 섞일 수 없는 인식의차이가 여기서 폭발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당시 창군 초기의 한국군에는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광복군 출신자가 뒤섞여 복잡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전면의 적과 대치중인 전시하에서는 이러한 것이 노출되는 것은 적었지만, 보기 드물게 이러한 사건은 종종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출신 모체의 군사사상 차이도 마찰의 큰 원인으로, 예를 들어 정규 일본 육사 출신의 김석원은 어떠한 전선에서도 끊임없는 사수를 주장했고 열세의 와중에도 일본군식 역공세를 주장했다. 그가 배우고 종군했던 일본 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전선에서 적군에게 압도되고 있다 하여도 아군을 떨쳐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기개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철퇴 보다는 한정 공세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일본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보면 단순한 주전론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안동 철퇴시 김석원과 김백일의 감정적인 충돌도, 이러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전해진다.

다시 사령부 회의로 이야기를 되돌리자.

김홍일과 김석원의 날선 이야기가 오고 갔을 무렵, 그 자리에는 보기 드문 해외동포 장교가 있었다는 것은 그 자리의 모두가  잊고 있었다.  미 육군 제 7 사단, 제 31 연대 제 1 대대장인 김영옥 대위가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조선계 미국인이다.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계 부대에 소속되어 유럽 전선에서 싸운 베테랑으로, 이민 2 세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그는 사병으로 징집된 후 우수한 재능을 금새 드러냈기 때문에 곧 장교로 임관, 미 육군은 영옥 소위를 당초 일본계라고 판단해 일본계 부대인 제 100 대대에 배속했다. 허나 대대장은 금새 김영옥 대\소위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임을 눈치채곤.

 

 

 

「 귀관은 일본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계라고 들었다. 귀관이 희망한다면 다른 부대로의 전출을 준비하겠다. 」
 

 

 

 

대대장의 말에 김영옥 소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그대로 일본인 부대에 머물러 일본인 사병들로 구성된 소대를 인솔하게 되었다.

왜 김영옥이 일본계 부대에 머물렀는지는 잘 모른다. 단지 그 자신은 생각보다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혹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던 중국인이던 미국에서는 백인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것에 큰 차이는 없었기에 같은 유색인종의 하나인 일본인에 대한 응어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김영옥 소위는 이탈리아 전선부터 프랑스 전선까지 언제나 냉정한 판단력과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인 야전 중대장으로 근무해 일본계 사병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김영옥이 받은 수많은 훈장 중 하나인 전상장은 야전에서 두 번 이상의 전상을 경험한 장병들에 수여되는 것으로 그 또한 김석원 준장처럼 항상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즉, 경력과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볼 수록 김영옥 대위도 어쩐지 김석원 사단장과 닮았다고 어린 석원은 생각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군인으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싸워왔던 그 이유는 어떻던 간에, 프로페셔널로서 이상적인 군인상을 체현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2차대전 종전 후 김영옥 대위는 퇴역해 LA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 발발에 따라 다시 자원해 현역 복귀해 참전했다. 이러한 모습도 어딘가 김석원 장군을 닮았다.
참고로 김영옥 대위는 2차대전에서도 전상장 외 특별 전공 십자장, 은성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전쟁에서도 특별 전공 십자장을 받았다. 이 점에서도 전대미문의 금치훈장 공 3급을 받은 김석원과 놀라울치만큼 흡사하다.

이야기를 되돌린다.
 

김홍일 소장은, 김영옥 대위가 그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외동포를 동포로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다. 말하자면 김영옥 대위를 자극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김영옥 대위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계급의 차이가 있다지만 김영옥은 미 육군 대위, 그것도 유럽 전선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 장교다.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가진 발언권을 생각하면.........하지만 김영옥 대위는 일절 반응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처신도 진정한 군인의 자세인가, 어린 석원은 숨을 죽인 채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 후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김홍일 소장과 김석원 준장 사이를 중재해 어떻게든 그 자리는 수습되었지만..

김영옥 대위는 일본의 미 극동군 사령부에서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아니 유일한 한국계 미군 장교였기 때문에 조기에 한국으로 건너 왔고 최전선에 직접 오고 갔기 때문에 김석원 준장과 어린 석원도 다소의 접촉이 있었다.

 

 

 

「 젋은 장교지만, 그야말로 진정한 군인이야.」
 

 

 

 

미 고문단과 사이가 않좋았던 김석원 준장조차 딱 그만큼만 말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거듭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낙동강을 눈앞에 군 북한군은 투망을 치듯 세 방면으로부터 포위망을 좁혀 왔다. 부산을 중심으로 동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호를 그리면 포항, 다부동, 왜관, 현풍, 마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과 일치하는 선이 생긴다. 한미연합군은 이 원주상에 최후의 방어선을 전개했고, 야전 사령부를 대구에 설치해 예비 병력을 적의 공격이 집중해 온 지점에 그때 그때 투입하는 기동방어에 철저하고 있었다. 이른바「부산 교두보」였다.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유엔군은 부산과 일본에 조금씩 증원되어 왔다. 하지만 미 극동군 사령부는 병력의 축차 투입이라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시간을 벌면서 대병력이 쌓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유엔군 총사령관은 바로 그 남자, 유엔군 총사령관이자 미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그 제국 육군을 괴멸시킨 남자가 우리를 지휘하는 것인가!!! 」
 

 

 

 

 

어린 석원이 맥아더 원수의 이름을 물었을 때, 김석원 준장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 좋다. 일본군 출신이 아군이 되면 얼마나 믿음직 한지 마음껏 실력을 보여 주지. 」
 

 

 

 

 

그리고 조선 사람의 근성도다.......... 그렇게 말하며 군도의 손잡이를 굳게 쥔 김석원 준장의 얼굴에는 군인이라기보단 마치 전국시대의 노부시(野武士)와 같은 겁없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본군 출신이라면 지금 김석원 준장의 오른팔 격인 참모장 최경록 대령도 일본군 출신이다. 그는 일본 토요하시 중학을 졸업한 후 특별지원병으로 지원, 우수한 재능을 보여 육군 예과사관학교 입교가 결정되었으나 그 때 소속 부대의 뉴기니아 출정이 정해졌다.

 

 

「 이대로 육사에 가면 전장에 나갈 기회는 영영 안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며 입학을 보류하고 그대로 출정, 뉴기니아 전선에서는 무려 3회에 걸쳐 야간 발도대를 인솔해 미군 진지에 돌격, 마침내 중상을 입고서야 후송된 맹장이었다. 김석원은 수도사단장 취임에 임해 그를 참모장에 요망했다. 지난 대전 중기 이후, 일본군에서는 육사에 지명되면 우선 살기 위해서라도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다. 허나 최경록은 그러지 않고 용감히 출정해 싸웠던 것이다. 그러한 부하가 동포 조선 사람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안 김석원은 자랑스러워 했으며 독립한 조국의 군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것에도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 김석원 준장은 수도 사단이 아닌 재편된 한국군 보병 제 3 사단을 인솔해 동부전선 영덕에서 북한군과의 항전을 계속 하고 있었다. 영덕은 포항 북방에 위치한 한가한 시골 마을이지만, 만약 북한군이 부산을 편익포위할 경우 반드시 지나게 되는 요지였다. 때문에 북한군은 이곳을 제압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으며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 온 북한군은 영덕과 포항에 동시에 공격하려 했다.
 

한국군에게 있어서는 포항을 실함하면 낙동강 방어선은 커녕, 단숨에 부산으로 통하는 길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었다. 부산교두보를 지키기 위해서도 포항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덕에서는 포항에 대한 공격을 지체시키기 위한 방어전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한미연합군의 낙동강 기동방어 전술에 대해서는 먼저 소개했다. 하지만 영덕과 포항은 동해안에, 그것도 산지에 위치해 열악한 당시의 도로 사정으로는 원군을 파견하려면 매우 곤란한 장소였다. 또한 영덕을 지키는 제 3 사단과 포항을 지키는 수도 사단도 북한군에 포위되어 고립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석원 준장은 부과된 전략적 목표에 대해 기대 이상으로 화답했다. 총탄이 쉴새 없이 날아다니는 포위된 최전선에서, 오직 일본도만을 가지고 진두에 서 휘하 장병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한국 육군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것이 진정한 군인이다. 적과 싸울 때는 그것이 장관이던 영관이든 지휘관이 맨 앞에 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일본도 칼집을 받쳐 들고 그 뒤를 힘겹게 뒤따르는 어린 석원은, 예전 일제시대 아버지로부터 들은 타츠미 나오부미 중장이나 쿠로키 다메모토 대장 등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곤 새삼 동명의 사단장 각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허나, 김석원의 이러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산에 속속 증원되는 유엔군도 오로지 수세방어만 철저히 할 뿐이었다..

 

 

 

「 각하, 맥아더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최경록 참모장의 초조한 물음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 3 사단이 포위된 상태에서도 포항에서 적을 계속 저지하여 부산을 지키고 있는데, 왜 공세로 전환하지 않는 것인가.

 

 

 

 

「.............그 남자는 기다리고 있다.」
 

 

 

 

김석원은 최경록 참모장의 초조한 물음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 이후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석원이 전후 퇴역한 김석원 장군을 찾아왔을 때 이 때의 이야기를 하며 그 때 맥아더 원수는 아무래도 북한군의 피로로 인한 공세 한계점과 인천 상륙작전의 실행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나름의 판단을 이야기 하자...

 

 

 

 

「 그 말대로다, 허나 그것을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느슨해진다.」
 

 

 

 

.....지휘관의 마음이 느슨해지면, 그 안도감이 장교와 사병들에게까지 옮겨 가 아군 만으로 끝까지 지킨다고 하는 결의가 무너진다........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석원은 그러한 남자였다.

실제 당시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결심하곤 그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가 압도적이었다. 해군에서는 기술적으로도 곤란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인천에는 해변이 없고, 하루에 고작 2시간 밖에 없는 만조시를 노리기엔 너무나 리스크가 크기에  항구에 접안해 상륙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독안에 든 쥐가 된다....또한 인천에 대한 상륙은 병력의 분산을 초래하기에 부산 교두보가 약체화 되면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그리고 워싱턴에서는........

 

 

 

「 언제나 튀고  싶어하는 허세의욕 할아버지의 세기의 대도박. 」
 

 

 

 

..........라고까지 혹평하는 정치가도 있었다.
 

분명히, 이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발 역전의 화려한 대작전은 없었다.

게다가 기술적인 어려움도 분명 있고, 실패한다면 맥아더와 그 휘하 막료단이 인천 항구 밖의 외해로 가라앉을 공산도 극히 높은 것이다.「대도박」이라는 비난도 반드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하와이까지 직접 날아가 합참의장과 대통령, 해군 참모총장을 설득시켜 인천상륙작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는 정식 결정되었다. 그 근거는 적군의 늘어진 보급선을 분단해 전선의 북한군을 고립시켜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적인 목적이 있으며, 또 수도 서울을 극적인 작전으로 탈환하는 것에 의해 한국민의 사기를 높여 전황의 호전을 전 세계에 어필한다라는 정치적, 심리적인 목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맥아더는 일찍부터 이 작전을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서울 함락 직후 전선 시찰을 위해 영등포에 섰을 때 이 구상이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또한 그 날 밤, 수원의 숙소에서 읽은 2백년 전 캐나다 퀘벡에서 영국군이 세인트 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프랑스군의 배후를 급습해 대승한 전사에 의해 작전의 유효성을 재차 인식했다고 한다.
 

어쨌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 적정 관측을 위해 인천에 첩보원을 투입해 접안 상륙에 필요한 알루미늄 구조물도 60개 이상 오사카의 기업에 발주했고 인천 상륙작전은 위장 정보라는 정보를 흘리는 등 유엔군 총사령부는 세심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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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裵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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