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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3.19 대구 근대의 풍경; 3

예측 불허의 구름 vol.3

번역 2012. 3. 29. 11:23 |

 

김석원 준장이 지휘하던 한국군 수도 사단이, 안동에 전개하고 있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군사령부의 막료 회의 참석 때문에 김석원 사단장은 막료들과 석원을 데리고 제 1 군단 사령부에 갔던 적이 있었다. 후퇴 중 사령부에 들른 신성모 국방장관은, 그 자리에서 재일 한국인 사이에서 의용병으로 지원하는 인원이 많아 머지않아 부대도 편성되어 도착할 것이라고 김석원 사단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노성을 질렀다. 제 1 군단장  김홍일 소장이었다.

 

 

 


「 36년이나 걸)려 일본놈들을 이 땅에서 내쫓았는데, 또 놈들이 온다니 기쁜가?」

 

 

 

이말에 경멸의 표정을 드러낸 김석원 준장도 반박했다.

 

 

 

「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압니다만 그들은 동포입니다 동포! 」
 

 

 

 

소년 석원은 이후로도 이만큼 분노했던 김석원 장군을 보았던 적이 없다. 전장에서의 맹렬한 질타와도 또 다른 이질의 분노였던 것이다.

국민당군 출신의 김홍일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출신과 그 관계자들은 꺼려 싫어하고 있었다. 또한 정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대륙전선에서 국민당군을 오합지졸이라 부르며 격파해 왔던 김석원 준장 쪽에서도 아무리 광복군이라도 국부군 출신은 부담스럽다. 이 섞일 수 없는 인식의차이가 여기서 폭발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당시 창군 초기의 한국군에는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광복군 출신자가 뒤섞여 복잡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전면의 적과 대치중인 전시하에서는 이러한 것이 노출되는 것은 적었지만, 보기 드물게 이러한 사건은 종종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출신 모체의 군사사상 차이도 마찰의 큰 원인으로, 예를 들어 정규 일본 육사 출신의 김석원은 어떠한 전선에서도 끊임없는 사수를 주장했고 열세의 와중에도 일본군식 역공세를 주장했다. 그가 배우고 종군했던 일본 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전선에서 적군에게 압도되고 있다 하여도 아군을 떨쳐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기개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철퇴 보다는 한정 공세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일본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보면 단순한 주전론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안동 철퇴시 김석원과 김백일의 감정적인 충돌도, 이러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전해진다.

다시 사령부 회의로 이야기를 되돌리자.

김홍일과 김석원의 날선 이야기가 오고 갔을 무렵, 그 자리에는 보기 드문 해외동포 장교가 있었다는 것은 그 자리의 모두가  잊고 있었다.  미 육군 제 7 사단, 제 31 연대 제 1 대대장인 김영옥 대위가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조선계 미국인이다.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계 부대에 소속되어 유럽 전선에서 싸운 베테랑으로, 이민 2 세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그는 사병으로 징집된 후 우수한 재능을 금새 드러냈기 때문에 곧 장교로 임관, 미 육군은 영옥 소위를 당초 일본계라고 판단해 일본계 부대인 제 100 대대에 배속했다. 허나 대대장은 금새 김영옥 대\소위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임을 눈치채곤.

 

 

 

「 귀관은 일본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계라고 들었다. 귀관이 희망한다면 다른 부대로의 전출을 준비하겠다. 」
 

 

 

 

대대장의 말에 김영옥 소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그대로 일본인 부대에 머물러 일본인 사병들로 구성된 소대를 인솔하게 되었다.

왜 김영옥이 일본계 부대에 머물렀는지는 잘 모른다. 단지 그 자신은 생각보다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혹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던 중국인이던 미국에서는 백인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것에 큰 차이는 없었기에 같은 유색인종의 하나인 일본인에 대한 응어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김영옥 소위는 이탈리아 전선부터 프랑스 전선까지 언제나 냉정한 판단력과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인 야전 중대장으로 근무해 일본계 사병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김영옥이 받은 수많은 훈장 중 하나인 전상장은 야전에서 두 번 이상의 전상을 경험한 장병들에 수여되는 것으로 그 또한 김석원 준장처럼 항상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즉, 경력과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볼 수록 김영옥 대위도 어쩐지 김석원 사단장과 닮았다고 어린 석원은 생각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군인으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싸워왔던 그 이유는 어떻던 간에, 프로페셔널로서 이상적인 군인상을 체현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2차대전 종전 후 김영옥 대위는 퇴역해 LA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 발발에 따라 다시 자원해 현역 복귀해 참전했다. 이러한 모습도 어딘가 김석원 장군을 닮았다.
참고로 김영옥 대위는 2차대전에서도 전상장 외 특별 전공 십자장, 은성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전쟁에서도 특별 전공 십자장을 받았다. 이 점에서도 전대미문의 금치훈장 공 3급을 받은 김석원과 놀라울치만큼 흡사하다.

이야기를 되돌린다.
 

김홍일 소장은, 김영옥 대위가 그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외동포를 동포로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다. 말하자면 김영옥 대위를 자극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김영옥 대위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계급의 차이가 있다지만 김영옥은 미 육군 대위, 그것도 유럽 전선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 장교다.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가진 발언권을 생각하면.........하지만 김영옥 대위는 일절 반응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처신도 진정한 군인의 자세인가, 어린 석원은 숨을 죽인 채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 후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김홍일 소장과 김석원 준장 사이를 중재해 어떻게든 그 자리는 수습되었지만..

김영옥 대위는 일본의 미 극동군 사령부에서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아니 유일한 한국계 미군 장교였기 때문에 조기에 한국으로 건너 왔고 최전선에 직접 오고 갔기 때문에 김석원 준장과 어린 석원도 다소의 접촉이 있었다.

 

 

 

「 젋은 장교지만, 그야말로 진정한 군인이야.」
 

 

 

 

미 고문단과 사이가 않좋았던 김석원 준장조차 딱 그만큼만 말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거듭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낙동강을 눈앞에 군 북한군은 투망을 치듯 세 방면으로부터 포위망을 좁혀 왔다. 부산을 중심으로 동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호를 그리면 포항, 다부동, 왜관, 현풍, 마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과 일치하는 선이 생긴다. 한미연합군은 이 원주상에 최후의 방어선을 전개했고, 야전 사령부를 대구에 설치해 예비 병력을 적의 공격이 집중해 온 지점에 그때 그때 투입하는 기동방어에 철저하고 있었다. 이른바「부산 교두보」였다.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유엔군은 부산과 일본에 조금씩 증원되어 왔다. 하지만 미 극동군 사령부는 병력의 축차 투입이라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시간을 벌면서 대병력이 쌓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유엔군 총사령관은 바로 그 남자, 유엔군 총사령관이자 미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그 제국 육군을 괴멸시킨 남자가 우리를 지휘하는 것인가!!! 」
 

 

 

 

 

어린 석원이 맥아더 원수의 이름을 물었을 때, 김석원 준장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 좋다. 일본군 출신이 아군이 되면 얼마나 믿음직 한지 마음껏 실력을 보여 주지. 」
 

 

 

 

 

그리고 조선 사람의 근성도다.......... 그렇게 말하며 군도의 손잡이를 굳게 쥔 김석원 준장의 얼굴에는 군인이라기보단 마치 전국시대의 노부시(野武士)와 같은 겁없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본군 출신이라면 지금 김석원 준장의 오른팔 격인 참모장 최경록 대령도 일본군 출신이다. 그는 일본 토요하시 중학을 졸업한 후 특별지원병으로 지원, 우수한 재능을 보여 육군 예과사관학교 입교가 결정되었으나 그 때 소속 부대의 뉴기니아 출정이 정해졌다.

 

 

「 이대로 육사에 가면 전장에 나갈 기회는 영영 안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며 입학을 보류하고 그대로 출정, 뉴기니아 전선에서는 무려 3회에 걸쳐 야간 발도대를 인솔해 미군 진지에 돌격, 마침내 중상을 입고서야 후송된 맹장이었다. 김석원은 수도사단장 취임에 임해 그를 참모장에 요망했다. 지난 대전 중기 이후, 일본군에서는 육사에 지명되면 우선 살기 위해서라도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다. 허나 최경록은 그러지 않고 용감히 출정해 싸웠던 것이다. 그러한 부하가 동포 조선 사람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안 김석원은 자랑스러워 했으며 독립한 조국의 군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것에도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 김석원 준장은 수도 사단이 아닌 재편된 한국군 보병 제 3 사단을 인솔해 동부전선 영덕에서 북한군과의 항전을 계속 하고 있었다. 영덕은 포항 북방에 위치한 한가한 시골 마을이지만, 만약 북한군이 부산을 편익포위할 경우 반드시 지나게 되는 요지였다. 때문에 북한군은 이곳을 제압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으며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 온 북한군은 영덕과 포항에 동시에 공격하려 했다.
 

한국군에게 있어서는 포항을 실함하면 낙동강 방어선은 커녕, 단숨에 부산으로 통하는 길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었다. 부산교두보를 지키기 위해서도 포항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덕에서는 포항에 대한 공격을 지체시키기 위한 방어전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한미연합군의 낙동강 기동방어 전술에 대해서는 먼저 소개했다. 하지만 영덕과 포항은 동해안에, 그것도 산지에 위치해 열악한 당시의 도로 사정으로는 원군을 파견하려면 매우 곤란한 장소였다. 또한 영덕을 지키는 제 3 사단과 포항을 지키는 수도 사단도 북한군에 포위되어 고립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석원 준장은 부과된 전략적 목표에 대해 기대 이상으로 화답했다. 총탄이 쉴새 없이 날아다니는 포위된 최전선에서, 오직 일본도만을 가지고 진두에 서 휘하 장병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한국 육군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것이 진정한 군인이다. 적과 싸울 때는 그것이 장관이던 영관이든 지휘관이 맨 앞에 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일본도 칼집을 받쳐 들고 그 뒤를 힘겹게 뒤따르는 어린 석원은, 예전 일제시대 아버지로부터 들은 타츠미 나오부미 중장이나 쿠로키 다메모토 대장 등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곤 새삼 동명의 사단장 각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허나, 김석원의 이러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산에 속속 증원되는 유엔군도 오로지 수세방어만 철저히 할 뿐이었다..

 

 

 

「 각하, 맥아더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최경록 참모장의 초조한 물음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 3 사단이 포위된 상태에서도 포항에서 적을 계속 저지하여 부산을 지키고 있는데, 왜 공세로 전환하지 않는 것인가.

 

 

 

 

「.............그 남자는 기다리고 있다.」
 

 

 

 

김석원은 최경록 참모장의 초조한 물음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 이후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석원이 전후 퇴역한 김석원 장군을 찾아왔을 때 이 때의 이야기를 하며 그 때 맥아더 원수는 아무래도 북한군의 피로로 인한 공세 한계점과 인천 상륙작전의 실행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나름의 판단을 이야기 하자...

 

 

 

 

「 그 말대로다, 허나 그것을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느슨해진다.」
 

 

 

 

.....지휘관의 마음이 느슨해지면, 그 안도감이 장교와 사병들에게까지 옮겨 가 아군 만으로 끝까지 지킨다고 하는 결의가 무너진다........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석원은 그러한 남자였다.

실제 당시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결심하곤 그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가 압도적이었다. 해군에서는 기술적으로도 곤란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인천에는 해변이 없고, 하루에 고작 2시간 밖에 없는 만조시를 노리기엔 너무나 리스크가 크기에  항구에 접안해 상륙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독안에 든 쥐가 된다....또한 인천에 대한 상륙은 병력의 분산을 초래하기에 부산 교두보가 약체화 되면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그리고 워싱턴에서는........

 

 

 

「 언제나 튀고  싶어하는 허세의욕 할아버지의 세기의 대도박. 」
 

 

 

 

..........라고까지 혹평하는 정치가도 있었다.
 

분명히, 이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발 역전의 화려한 대작전은 없었다.

게다가 기술적인 어려움도 분명 있고, 실패한다면 맥아더와 그 휘하 막료단이 인천 항구 밖의 외해로 가라앉을 공산도 극히 높은 것이다.「대도박」이라는 비난도 반드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하와이까지 직접 날아가 합참의장과 대통령, 해군 참모총장을 설득시켜 인천상륙작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는 정식 결정되었다. 그 근거는 적군의 늘어진 보급선을 분단해 전선의 북한군을 고립시켜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적인 목적이 있으며, 또 수도 서울을 극적인 작전으로 탈환하는 것에 의해 한국민의 사기를 높여 전황의 호전을 전 세계에 어필한다라는 정치적, 심리적인 목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맥아더는 일찍부터 이 작전을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서울 함락 직후 전선 시찰을 위해 영등포에 섰을 때 이 구상이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또한 그 날 밤, 수원의 숙소에서 읽은 2백년 전 캐나다 퀘벡에서 영국군이 세인트 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프랑스군의 배후를 급습해 대승한 전사에 의해 작전의 유효성을 재차 인식했다고 한다.
 

어쨌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 적정 관측을 위해 인천에 첩보원을 투입해 접안 상륙에 필요한 알루미늄 구조물도 60개 이상 오사카의 기업에 발주했고 인천 상륙작전은 위장 정보라는 정보를 흘리는 등 유엔군 총사령부는 세심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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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裵君
:

예측 불허의 구름 vol.2

번역 2012. 3. 28. 14:08 |

 

 

예측 불허의 구름(斜め上の雲) 제 2 편 ㅋ 중간 건너뛰고 대충 번역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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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군은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한국의 수도 서울은 불과 4일 만에 함락되었다.
 
전편에 언급한 것처럼, 석원의 고향 파주는 서울의 북방에 있다. 북한군 주력병단이 통과한 뒤에야 사람들은 간신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작 사흘만에 나라의 수도가 함락되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다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석원은 재차 이승만 정부의 취약성에 대해 놀랐다.

 
7월이 되자 전쟁은 더더욱 북한군의 우세로 진행되어 조선은 금방이라도 인민공화국이 될 것만 같다고 석원은 생각했다. 허나, 아버지 김신오는 무엇인가를 느꼈던지 갑자기 가재를 정리해 야음을 틈타 부산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아무리 호적계의 말단 관리지만, 서투르게 남아 있어서는 북한군의 물자 징발은 커녕, 연행되어 죽거나 전선의 총알받이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석원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보다는 싸우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 석원의 머리에는 열살때 경험한 일본 패전 후의 참상과 독립군이라 칭하던 건국준비위원회 무리들이 들어와 설치던 그 모습이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전 대전에서 남을겁니다.」
 





대전에서는 아직 한국 육군의 정규군과 의용군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미군도 있다고 한다. 석원은 무작정 거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석원이 정식으로 한국군에 입대한 것은 그 다음해 여름이지만, 대전에서 가족과 헤어질 때 아버지 김신오는 이렇게 말했다.







「기왕 한다면 확실히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해라.」
 






라며 아들을 격려했다. 주위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끄덕인 것을 보면 이제 살아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가족들과 헤어진 석원은 의용병 모병지로 갔지만 운좋게 사단 사령부에 보내지는 무리들에 선발되었다. 석원이 도착한 사령부 텐트의 안쪽에는 각하라 불리우는 사단장이 있었다. 키는 약간 작지만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남자로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옆에 차고 있었다. 지나가던 그 사단장이 갑자기 석원을 보고 물었다,






「너는 몇 살인가?」
 






나이를 솔찍히 대답하면 되돌려보낼 것이다. 하지만 전시중이기에 본인이 말한 나이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석원은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19세입니다」
 





- 라고 대답했다.







「그래? 좀 어려 보이는데 넌 무슨 띠인가?」








「.......돼지띠입니다」




 

- 석원이 당황해 사실대로 대답하자 사단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19세라면 양띠여야 했다. 사단장은 이 소년이 나이를 속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 같지만, 묵인하는 것 같았다.







「이름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그 사단장이 이름을 물어본 것이 이후 석원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 김석원이라고 합니다」








「.....호.....나와 동성/동명은 예전 일본군 소년병도 있었건만 너는 좀 어리구나.」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그렇게 말하곤 석원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 내 옆에서 당번병 겸 연락병으로 근무해라 」







- 라고 말했다.



이름이 같았기 때문일까. 김석원 장군은 석원을 자식처럼 귀여워했다.








「 아직 어린 너를 전선에 내보낼 수는 없다. 나와 있을 때는 당번병을 하고, 내 부관 밑에서 연락병을 하면서 공부해라. 군인이 되고 싶다면 공부해야 한다. 」
 






그렇게 말하곤 틈날 때마다 작전요무령과 같은 군사학과 일본어에 대해 강의를 했다.







「기초는 가르쳐 준다.」
 






그리고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 라고 했다.
 
이 김석원 장군은 일제시대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한 뒤 북지전선에서 맹활약, 산서에서는 일본군 1개 대대를 지휘해 국부군 1개 사단을 격파해 금치훈장 공 3급을 받았다. 소좌의 몸으로, 게다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 훈장이 수여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창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군에 있어서는 제일의 용장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은...






「 굉장한 행운이다」






- 라고 참모장 최경록 대령이 말했다.


김석원은 광복 후 한국 육군 대령으로 한국군 제 1 사단장에 임명되어 한국 육군의 건설에 노력하고 있었다. 일본의 옛 무사같은 강직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북교역에 관한 직언을 행했기 때문에 해임되어 예비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온한 정세를 헤아려 대전에서 의용군을 조직 훈련해 개전시에는 군부의 요청으로 현역으로 복귀해 수도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가 같은 이름이라는 흔치 않은 인연 외에도 석원을 거둬들인 것은 태평양 전쟁 말기 수많은 일본군 소년병들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기에 더이상은 젊은이를 사지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작용했을 것이리라.

 
허나, 석원의 이런 행운과는 별개로 한국군은 여전히 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장병의 대부분이 외출, 외박에 나가 당직 밖에 남지 않았던 일요일 새벽녘의 기습을 받은 뒤 전열을 추스리지 못했고 장비도 월등히 뒤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개전시 남북의 군사력은 현격한 갭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자면 당시 한국군에게는 비축탄이 단 몇 일 분도 없었던 상태였고, 1월에 한미 상호방위 협정이 조인되었지만 그에 따른 군수 물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통일을 외치고는 있었지만 실제론 도저히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미 군사고문단이 그것을 허용할 리도 없었다. 또한 비록 그 상태로 북침했다고 해도, 북한군은 충분히 반격이 가능했고 오히려 역침공을 허락해 똑같이 반도 남단의 부산까지 몰릴 가능성이 더 컸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전면에 앞세워 진격해 왔지만 한국군에게 전차는 없었고 대전차 병기도 부족했다. 유효한 대전차 병기라고는 미군이 가지고 온 3.5 인치 바주카만이 간신히 소련제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지만 그 수는 적어 미군조차 고전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석원은 이렇게 많은 전차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에게 놀러갔을 때 남방으로 반출되던 일본군의 전차를 몇 대 본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 전차 집단은, 포탑이 민가의 처마 끝을 칠 정도로 좁은 골목을 가고 있었는데 어린 석원이 봐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석원과 아버지 앞에서 전차대의 대열이 멈추고, 선두 차량의 해치가 열리고 일본군 장교가 내려왔다.





「서면은 어딘가?」
 




안경을 쓴 그 일본군 장교는 풀죽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버지가 이리저리 장소를 설명해 주자 다시 탑승해 출발했다.






「.........저게 정강백만 관동군인가. 고작 저런 장교로 괜찮을까.」
 





아버지의 혼잣말을 들으며 보았던 그 장교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였던 것 같다. 석원은 그 광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 때 본 일본군 전차는 아담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었지만 포신이 가늘고 짧아 약해 보였다. 그에 비교해 북한의 T-34는 거친 외관이지만, 소년에 눈에도 그만큼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사단장 김석원 준장에게 그런 감상을 말하자.







「 T-34는 훌륭한 전차다. 독일조차 저녀석에 호되게 당했다고 한다. 네가 부산에서 보았다는 것은 아마 관동군의 치하 전차일 것이다. 그것은 대전차 전투는 할 수 없는 물건으로 무엇보다..............」
 






........애초 설계가 보병 전투의 보조가 목적이므로 방법이 없는 것이었지만.........이라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왜 적의 전차를 칭찬하십니까?」
 







석원은 그게 의문이었다.







「 적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무슨 상관인가? 성능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석원 너는 우리나라를 좋아하는가?」







「네.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큰 나라라고 생각하나?」
 








잠시 생각하고 석원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석원 준장이 답했다.








「그것과 같은 것이다. 감정적으로 좋고 싫음의 문제와는 다르다 병기의 좋고 나쁜가의 문제다」







그러면서 김석원 준장은 군인에 있어 가장 피해야할 자세는 눈앞의 실물에 제멋대로인 규정을 적용시켜 납득한다는 경직성이다라고 말했다. 김석원 준장은 이어 말했다.






「나는 일찌기 일본군을 이끌고 미군이 지원하는 국부군과 싸웠고, 지금은 미국과 함께 소련이 지원하는 북괴군과 싸운다는 이상한 길을 가고 있다 」
 


 


그러면서, 그러한 경험에서 각국 군대의 장단점에 대해 느끼는 것이 많다고 했다.









「 뭐, 앞으로는 미국식 전략 전술이 주류가 되겠지만 그래도 옛 일본군의 전략/전술에도 배울 만한 점은 많다. 특히나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의 군대에서는 말이지.」
 








특히, 하사관이 병과 밀착된 점은 강점이라고 했다.









「 내 부대에는 옛 일본군 출신이 많다. 너는 앞으로 미국을 배워야 하지만 그들에게도 배우는 것이다. 알겠나? 」
 








김석원이 준장으로 현역 복귀해 의용군을 조직하자 한국 내에서 갈 곳을 잃고 있던 구 일본군 출신들은 그의 지휘 아래 집결했다. 이후 김석원이 수도 사단장으로 임명되자 김석원은 그들을 휘하로 두고 재편한 한국군 수도 사단을 인솔해 고분 분투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당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도 일본군색이 진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김석원의 사단은 특히 그것이 농후했다. 이와 같이, 열세에서도 끈기있게 싸우는 한국군에 유독 일본군 출신자가 많은 것에 미군은 주목했다. 미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서도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장교는 일본군 출신은 한국군 장교단 중에서도 꽤나 특수한 부류라고 생각했는지......
 





「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들 한국군 내 일본군 출신자 혹은 그 일파(만주군 출신)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용맹하다. 허나 생명에 대한 관념이 부족해 전황에 따라서는 매우 쉽게 사지에 몸을 던져서라도 싸운다. 」
 







- 라고 쓰고 있다.
 



장군은 소년에게 이어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병력과 무기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 힘이 없는 자는 지혜와 근성으로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최후는 육탄으로 몸을 던져 싸우는 것이다.」










......과연.....하지만 납득한 소년 석원의 얼굴에는 이내 불안한 표정이 력력했다.










「 걱정은 필요 없어. 조금만 더 버티면 미군이 온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좋다라고 김석원 준장은 말했다.
 






7월7일, 유엔 안보리에서 국제 연합군의 파견이 결정되어 미군이 주체가 된 연합군은 일본으로부터 출발해 부산에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일미군은 평화로운 점령지 주둔군으로 벌써 5년이나 보내 평시 편제인 채로 훈련받아 장비도 부족한 상황이었었다. 이래서는 미 육군이라도 북한군에 쉽게 반격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규모 지원군의 도착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7월 하순, 결국 한미 연합군은 대전으로부터 철퇴해 경상북도까지 철퇴했다.  그 몇 일 후,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명령으로  더더욱 남동쪽으로 철퇴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 적군의 진격을 지체시켜 연합군의 증원을 기다린다는 전략이 결정되었다.
 

당시 김석원은 수도 사단을 인솔해 안동을 지키고 있었지만, 최경록 참모장이 가져온 육본의 후퇴 명령서를 보곤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격앙했다. 앞으로 1시간 이내에 철퇴하라는 명령서였다...한국군 수도사단은 낙동강을 뒤로 하고, 문자 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철퇴하기 위해서는 낙동강에 야전부교를 가설해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피난민도 있다. 군민의 이동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며 특히나 지금같이 전군이 오직 밀리고만 있을 때는 전군 궤멸의 우려마저 있다. 실제로도 서울 철퇴시 한강교 폭파를 실행했을 때는 피난민까지 말려든 대참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육본은 그것을 단 1시간만에 하라고 말한다. 게다가 명령 접수 시각은 새벽 2시.......왜 이런 명령을 굳이 제공권이 확보되어 있는 주간에 하달치 않는지...어린 석원도 그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허나, 용장 김석원에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보다 지금은 불퇴전의 결의만이 아군을 떨쳐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했다. 밀리고만 있다고 도망만 가서는 안된다...적/아군에게 철저 항전의 결의를 보이도록 친 배수의 진을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나 원통했던 것이다.
 

결국 김석원 사단장은 군단 사령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에게

 

「귀관은 퇴각을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퇴각만 해서 이길 수 있는 건가? 」

 

 


............라고 야유하고 말았다;; 전황이 계속 밀리고만 있기 때문에 김백일 준장도 기분이 나쁘다..허나 만주군 출신인 김백일 준장은 군 경력에서 까마득한 후배였기 때문에.......

 

 

「....명령입니다. 후퇴는 명령입니다!!」
 

 

 

이에 수화기를 마루에 내던진 김석원 사단장은;;

 

 

「적을 눈앞에 두고, 어찌 살아서 퇴각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외치며 허리의 권총을 뽑아 자신의 관자놀이에 꽉 눌렀다. 어린 석원이 순간 팔에 매달렸지만 김석원 장군의 각오는 상당한 듯 놀라 뛰어온 최 참모장이 눈물을 흘리며 설득한 후에야 사단장은 간신히 철퇴를 승낙했다. 이후 한국군 수도사단은 동해안에 인접한 영덕까지 나아가 동부 전선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일견 개전으로부터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해 온 북한군이지만 그 속사정은 매우 힘들었다.
 

미국의 괴뢰 이승만과 그 잔당들을 반도에서 모조리 쫓아버리고, 5주년 광복절을 서울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것이 인민공화국 김일성 수상의 지상 명령이었다. 그 명령 때문에 북한군은 손해를 뒤돌아보지 않고 여기까지 진격해왔던 것이었다. 그 결과 전력 보충은 절망적이었고 병력 또한 각 사단에서 상한 80퍼센트 정도의 충족율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개전 초기 한국군을 압도했던 T-34전차 보충은 없었다(...)
 

보급도 잘 되지 않았다. 서전에는 계획적으로 비축된 탄약과 식량이 있었지만, 서울을 함락 이후 본격적인 남방 진공작전이 시작된 이후로는 보급로가 미 공군에 의해서 폭격당해 병참선은 토막토막 끊기게 되었던 것이었다. 탄약은 둘째치고, 식량조차 지역 주민으로부터 징발할 상황이 되었다. 전황이 좋을 때조차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는 군대를 좋아할 민중은 없다, 당연히 민심은 급격히 인민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금년 8월 15일은 서울에서 통일 국회를 개최한다」
 

 

.........그렇게 호언 장담하던 김일성도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전선이 교착되는 것 만으로도 사단장이나 참모들을 경질했다. 때문에 이 시기 인민군 상층부에는 일종의 기묘한 권태감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일선 병사들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 전의는 왕성했고, 미군도 방어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그리고..........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영덕의 구원은 어렵다고 판단해 진로를 바꾸어 포항에 들어가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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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측 불허의 구름 vol.1

번역 2012. 3. 27. 11:24 |

 

 

일본 근대사를 다룬 시바 료타로 선생의 세미 논픽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 坂の上の雲) 패러디(...)로 무대와 주인공은 한국으로(...) 옮긴 예측 불허의 구름(斜め上の雲) 입니다;;

아주 예전에 술먹구(;;) 집에 들어와 인터넷 하다 우연히 발견한 건데, 그땐 꽐라모드라(;;) 斜를 針으로 읽어 바늘 위의 구름으로 번역했는데 명백한 제 오역입니다(;;) 아..술먹고 깼을땐 얼마나 쪽팔리던지(;;)

하지만 모처의 모님이(...) 지적한답시고 기울기 위의 구름으로(...) 번역한거 보곤 더 뿜었습니다; 이건 마치 국민학교 시절에 본 드래곤 퀘스트 III 만화책에서 보스인 마왕 바라모스를 '장미 모스' (....) 로 번역한 것 이후 최고의 번역이었달까요(;;)

 

여튼 글 나갑니다 ㅎ   

 

 

 

 

정말로 작은 나라가, 개화기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그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이 경기도이며, 경기도는 수도인 서울을 포괄하고 있는 이 나라의 중앙이다. 당시 경기도에 위치한 파주의 큰 읍은 금촌으로, 금촌 시가에는 이미 철도 역사가 건설되어 있었고 이 철도는 서울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만철(만주철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금촌은 서울 북방의 요충으로 여겨졌지만 근처의 풍경이 한가로웠기 때문에 그처럼 대단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니 이 시대 작은 한국의 상징이 될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우리는 한 인물의 뒤를 쫓지 않으면 안 된다.
 


「어이~ 원~~」




어린 시절 원이라고 불리우던 이 이야기의 주인공 김석원(金錫元)은 일제시대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김신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 총독부의 공무원은 일본인이 대다수였지만 독점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김씨 가문은 조선시대 몰락한 하급 양반 가문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김신오는 어떻게든 말단 공무원은 될 수 있었다. 김석원은 쇼와 10년도에(1935년) 7개월 만에 태어난 약한 아이였지만 이후 장성해서는 건장한 남자가 된 것을 보면, 반드시 조산아라고 해도 그 후의 성장에는 지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석원이 10살이 되던 해의 여름, 천지가 개벽할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대일본제국의 패전과 그에 따른 조선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석원이 살던 금촌읍의 분위기는 사뭇 기묘했다.




「비적들이 마을에 온다」
 



..........이런 분위기로, 일본 관헌의 철수 후의 무정부 상태는 남아있던 조선인 공무원들도, 마을 사람들도 어찌할 줄 몰랐다. 게다가 특히나 이 마을에서는 소위 친일적이랄까, 자제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있던 집안이 많기도 하여 당시의 조선에서도 일본에 대해선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지원해 지나와 남방전선에 아들들을 보낸 집도 많다. 요컨데 해방 정국에서는 바야흐로 친일 모리배, 민족 반역자들이 많았던 마을이었다.
 
때문에 같은 조선인이라도 진정으로 조선 독립을 위해 지나나 만주에서 피흘리며 싸웠다는 광복군과는 달리, 일제시대에는 단지 불령 선인이었을 구 공산당계 반일 집단과 조선 내 민족주의 계열은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단지 비적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재빨리 전승자, 해방자라 자칭했다. 이들 소위 건국준비위원회 독립군은 파주를 접수하고 남하했지만 그 인원수는 불과 서른 명 안팎이었다.




「 악독한 일제에 가담한 죄로 15만엔의 배상금을 인민공화국에 헌납하라.」
 



- 라고(...)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독립군의 젊은 대장이 권총을 들이대며 읍사무소에 명해 때문에 마을은 공포에 휩싸여 결국은 그에 굽히게 되었다. 이들 소위 독립군은 이미 조선 천지는 우리 것이라는 교만함을 얼굴에 띄운 채 활보, 그들에게 돈을 바치지 않는 집과 가계는 닥치는 대로 불지르고 다녔다. 또한 읍내의 구 관공서 등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접수」
 




라는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석원은 10살 어린 시절에 본 이 광경을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어」
 




...라고 그는 후년 고향으로 보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다.

 
쇼와 20년, 아니 해방되었으니 서기로 말하면 1945년의 여름... 정체성 불분명한 건준과 사이비 독립군의 짧은 시절이 지나간 후에는 미소가 각각 남북 조선에 진주해 치안이 유지되는듯 했으나 곧이어 한반도의 유엔 신탁 통치안에 대한 찬부나 정치 사상에 대해 각 세력의 항쟁이 격화되어 결국 1948년에는 남북 조선이 분열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남조선에 성립된 대한민국은 여전히 농가가 곤궁했다. 석원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석원도 불과 13살의 나이부터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의 농사일 뿐만 아니라 남의 집 농사일과 온갖 허드랫일도, 심지어는 산에 들어가서 사슴이나 토끼까지 잡아다 마을 장에서 팔았다.
 
 
이런 석원의 아버지 김신오만큼 고향에서 일화가 많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저렇게 착실한 사람도 없다」
 




...........라는 이야기로,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다. 그는 몰락 양반가의 5남이었지만 일찍부터 독학으로 공부를 해 총독부의 하급 관헌수험에 합격해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던 중 광복이 왔다. 하지만 광복이 되자마자 빨리 세관 공무원에서 퇴직해..






「 해방 정국에서 내가 뭘 한다고.」
 




...라고 말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급한 나머지 건국준비위원회나 이승만 정권으로 허겁지겁 갈아타려고 한 구 일제시대 조선인 하급 공무원들은 대부분 정쟁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는 사람마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김신오는 이런 와중에도 일제 시대부터의 성실한 모습이 높이 평가되어 고향 금촌읍 호적계의 말단 관리로 다시 채용된 것이다. 다만 이 자리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박봉으로, 집안을 그 급료 만으로 부양하기는 힘들었다.






「 밥만은 먹여주마. 하지만 나머지는 자기 힘으로 해결해라.」
 




김신오는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석원이 남의 집 농사일을 대신 해주거나, 산에서 사슴이나 토끼를 잡아 돈을 번 것도 말하자면 아버지 김신오의 교육 방침이었다. 석원은 이 벌이로 간신히 돈을 모아 책들을 샀지만, 그러나 이 정도의 돈벌이로도 학교에는 갈 수 없었다.





「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
 



라고 석원이 조른 적이 있다. 하지만 김신오는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 내게 돈이 있어야지.」





이렇게만 말하고 마는 것은 미안했던지, 이 아버지는 이후 약간의 명언을 토해냈다. 나폴레옹이나 타이코 히데요시 등 동서고금의 영웅 호걸은 모두 빈궁 속으로부터 태어났는데 내게 능력이 없는 것도 말하자면 너희들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식에게 줄 학자금도 없으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석원아, 가난이 싫거들랑 공부를 해라」
 




이것이 이 시대의 유행이기도 했다. 정권은 미국과 대륙에서 귀국한 소위 독립투사들에게 넘어갔지만, 그 정부에는 실무가가 없었기 때문에 학문이 있어 실무를 할 수 있다면 일본 통치하에서 영달하고 있던 사람들이어도 국가는 고용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통치자는 바뀌었지만 일제 시대와 같이 취직의 길은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먹기 위한 길이었고, 특히나 광복으로 일자리를 잃은 소위 친일파의 자식들에게 있어 그것 말고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구출해 낼 방도는 없었다.





「나도 공부하고 싶다」





김석원은 늘 생각하곤 했다. 그러기에 남의 집 전답에서 밭을 갈고, 야산을 돌아다니며 사슴이나 토끼를 잡으면서도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공짜 학교는 없을까...」 




그렇게 있을 턱도 없는 꿈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 한국정부는 국내 통치에 부심하고 있었다. 그 상징이 바로 남조선 노동당이 주도한 대규모 반정부 봉기의 빈발이었을 것이다. 남조선 노동당은 1946년 11월에 남부 조선의 좌익 각 계파가 합동해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특히나 창군된지 얼마 안된 국방경비대(훗날 국군으로 승격) 내부에 조직자 공작을 행해 많은 동조자를 양산하고 있었다. 1948년 4월에는 제주도에서 이 남로당이 조직한 대규모 봉기가 벌어졌고, 10월에는 여수/순천에서도 군내 적색분자의 선동에 의해서 대규모 군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토벌전 끝에 지리산에 들어간 후 태백/소백산맥을 넘나들며 끝까지 항전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 패잔병과 합류해 최종적으로 진압된 것은 1956년이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철저한 숙청을 벌여 많은 군 간부가 남로당 관계자로 적발되어 처분되었다. 당시 소령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의 박정희도 불명예 제대 처분이 되었다.
 
허나 그 군이라고 해봤자 정부의 재정난에 의해 급여 수준은 낮았고 군복 이외의 일용품 조달과 모병을 각 연대에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병기에 대해서도 1948년의 여름 경부터 미군의 제식 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차는 없었고 야포도 105밀리 유탄포가 최대, 공군은 연습기와 연락기 밖에 없었기에 근대적인 전력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49년 6월, 미군은 한국으로부터 철수했고 다음 해 1월에는 대만과 한국을 미국의 서태평양 방위라인으로부터 제외한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 국민들은 불안하게 생각했다. 허나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도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1948년부로 소련군도 북한으로부터 철수했기에 가까운 시일 내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진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후 미국은 애치슨 성명으로부터 2주일 후 한국과 한미 상호방위 협정을 조인해 최소한의 연결고리는 마련한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이 내보내 온 항일구국의 영웅이자 조선민족의 지도자(...) 김일성 아래에서 기업의 국유화나 농지개혁이라는 일련의 정책이 취해져 경제는 빠른 시일내에 회복하고 있었다. 이것에는 공산주의 특유의 중앙 통제에 의한 경제정책이 제 기능을 발휘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북조선은 일제시대 댐이나 화력발전소 등 중공업 인프라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어 납쪽보다 상대적으로 공업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 그러한 시설이나 기업을 접수, 국유화한 것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 다음편에 계속 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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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근대의 풍경;

아무거나 2012. 3. 19. 16:38 |

이민 기념(;;) 첫 포스팅은 지난 주 일요일(2012/3/18) 잠깐 구경갔던 구 대구 화교협회 건물입니다. ㅎ

인제는 가벼운 기행이나 먹거리 그리고 취미 위주의 소프트한 블로그로..ㅎ


1920~40년대 조선 대구구 최강의(...) 부호였던 서병국씨의 주택 겸 집무실의 일부(...)였던 2층 양옥입니다. 아까렌까가 특징인 전형적인 20년대 건축물이지만 네 모서리의 화강암 마감으로 당시의 일본풍 건물과 차별을 둔 대구 갑부의 센스가(;;)  


지난 일욜 1시 경 잠깐 반월당 나올 일이 있었는데, 503번 버스 타고 내리니 구 아카데미 시네마(...) 근처더군요; 쇠락한 구 영화관의 잔영이 안타까웠지만 뭐 하여튼(;) 다시 지하철 역으로 발길을 옮길려다 보니 어차피 3시까지는 시간이 있는지라  갑자기 예전부터 가봐야지 하다가 만 구 서병국씨 저택 건물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잠깐 발길을 돌려 아카데미 시네마 골목으로....들어가자 마자 조금 지나니 주차장 뒤에 그 건물이 보이더군요. 으와 ㅎ



이날 날씨가 좀 변덕스러워(;;) 역광일때 찍어 좀 흐립니다; -ㅅ-; 폰카라서 뭐(;;)

이게 근대 건축물로 지정된 녀석인데, 의외로 처마가 내려앉아 있는 등 관리가 부실하더군요;;; 아쉬웠습니다;

  
지금은 대만계열의 대구 화교초등학교&화교협회가 쓰고 있습니다. 이건 화교학교 들어가는 문(;;)과 통로;; 

...............오프닝이 무려 대명태조 홍무제 주원장;;; orz 임시정부에게 있어 중화민국은 마치 재조지은의 大明과 같다는 대만계 화교의 자부심일까요;;;  


..........당태종 이세민과 명태조 주원장의 보기 드문 콜라보레이션(...) 둘 다 반도를 도운 황상이시니 이것 또한 과연 대만의 센스(;;)
 


진 시황제 영정의 모습도 있습니다(;;)  이 세명이 삼제회전을 벌이면(...)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통로(...) 네 바로 그 삼제통로로(...) 들어와야 보이는 곳이라 저도 이 거릴 자주 지나다녀도 몰랐는데 여튼;;; 들어오면 이렇습니다. 좌측이 바로 그 서병국씨 저택,현 화교협회 건물이과  우측이 화교 초등학교네요.


여기가 바로 화교소교; 그리고,....


;;;;;;;;;;;;;;; 오오 오오...주차장 좌측 모서리엔 바로 임정의 재조지은(;;) 장개석 총통 각하의 존안이 있었습니다(...)


인자하고 자상하신 장총통 각하의 멋진 (대형)흉상.


그리고 이번 방문의 주목적 대구 화교협회 건물. 유래는 뭐 앞서도 소개했다시피 식민지 시대 대구 최고의 갑부였던 서병국씨의 1000여평 개인 저택 부지의 근대식 건물입니다; 이 건물 주위의 전후좌우 한옥들이 다들 범상치 않다 했더니 다 이양반 것이었더군요;;


아아;;; 반도에서도 아직 대구에는 삼민주의의 정신, 진정한 재조지은 청천백일기가 당당히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ㅠ.ㅠ 국민당빠인 저로써는 그저 감읍중 ㅠ.ㅠ


간단한 이력(..이랄까)


해방 직후의 흔적인지 아주 오래된 듯한 간판에는 화상공회라고 써있네요; 지금은 대만계..아니 대구에서도 중화 상권 자체가 별개로 존재치 아니한걸로 아니 별 의미는 없는 듯; -ㅅ-;


2층 중앙 상단에도 크게 박혀있는 흑색 대리석의 음각; 아래 보면 중화상회 1949.4.4 이라 쓰여 있습니다;;


지금 보아도 참 멋진 건물입니다. ㅎ

이상 간단히 둘러본 대구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인데, 보존 상태가 조금 아쉽긴 해도 이상화/서상돈 고택같이 너무 티나게 복원한 것 보단 훨씬 낫습니다. 거긴 복원인지 모조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깔끔해서리;;;












Posted by 裵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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